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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대가 야산 이달의 관법(觀法)

아이언써클 2023. 7. 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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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가 무려 가죽끈을 세 번이나 다시 묶으며 애지중지 여겼다는 책이 바로 《주역》이다. 공자는 47세에 처음으로 주역을 접하고 죽음을 앞두고 “하늘이 나에게 시간을 더 허락한다면 주역을 더 열심히 공부할 텐데”라는 말을 할 정도로 주역을 사랑했다.
 
 

Ⓒ교보문고

 
  한국 주역의 대가는 야산 이달(1889 - 1958)이다.
 
  야산은 15살 때부터 도를 닦기 시작하여 19살에 득도했다고 전해진다. 20살 때부터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관법(觀法)’으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러한 능력으로 증산(姜一淳) 선생까지도 그를 인정했다고 하니 그의 능력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야산의 관법 능력은 어디서 왔을까? 그의 관법은 영적 능력, 기도, 독서, 관찰에서 왔다고 보인다. 야산의 관법(觀法)은 강호(江湖)에서는 세 가지 사건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다(Ⓒ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2007).
 
 

야산의 손자 이응문선생님Ⓒ 한겨레

 
  첫째, 그는 대구 ‘미두장’(米豆場)에서 천문학적 돈을 벌면서 내공을 입증하였다. ‘미두’ 란 미곡과 대두를 말한다. 당시 대구 미두장은 남한에서 가장 큰 곡식 거래장이었다. 당시 쌀 100석만 예치하면 미두 통장을 개설할 수가 있었다. 이 통장에 보증금을 가진 사람은 몇천석, 또는 몇만석을 외상으로 매수할 수 있었다. 가격이 내려가면 미두를 매입하고 반대로 가격이 올라가면 미두를 매도하는 식으로 차익을 볼 수가 있는 구조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주식의 선물시장과 같다.
  야산은 일제 강점기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장소로 미두장을 택했다. 그는 36세가 되던 1924년부터 10년 동안 미두장에서 약 2,900만 원을 벌었다. 당시 소 한 마리 값은 10원(현재는 약 500만 원)이었다. 일제 시대에 2,900만 원이라는 돈은 지금으로 따지면 몇 조에 이른다. 그는 당시 이 시장에서 ‘옥관도사’로 불리었다. 옥관도사란, 옥으로 된 관을 쓴 도사라는 뜻이었다.
 
  그는 대구 암자에서 도를 닦다가 한 번씩 시장에 나오면 미두장에서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 미래를 볼 수 있으니 투자의 신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주위 사람들도 그를 따라서 투자하면 백전백승이었다. 이렇게 번 돈으로 그는 무엇을 하였을까? 그는 이 돈을 만주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만주의 독립운동에 돈 대부분을 보내고 이외의 돈은 광산에 투자하였다. 그는 전국 15곳의 금이 있는 광산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다. 이돈으로는 힘든 생활을 하는 백성들을 위한 공동체 터전을 위해 사용하였다.
 
 
  둘째, 그가 해방을 맞이하고 잡은 ‘괘’는 ‘은둔’이었다. 해방이 되자 많은 사람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때 좌익과 우익 간 싸움이 거셌다. 야산은 해방 이후 사회가 혼돈의 세계로 흘러가는 것을 미리 읽었다. 이때 그는 제자들과 함께 ‘대둔산’으로 들어갔다. 당시 그가 잡았던 괘는 바로 ‘수뢰둔(水雷屯)’ 였다. 이는 위에 물이 있고, 아래에 천둥이 치는 괘이다. 이는 모든 사면이 막혀 있는 형국을 나타낸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상을 야산은 수뢰둔괘로 보았다. 야산의 선택은 ‘둔괘’에 맞는 둔산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전북 완주군과 충남 사이에 있는 대둔산은 험하기로 유명한 바위산이다. 계백장군의 결사대가 최후의 항전을 하다 전사한 곳이 이곳이다.
  동악 때에도 동악의 최후 항전을 했던 곳이 대둔산이다. 야산은 대둔산의 석천암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길렀다. 철저하게 은둔하면서 사람들이 싸우는 곳에서 떨어져서 자신과 제자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가 만약 해방 이후 활동을 했다면 일제 강점기 때에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던 그를 시기하는 사람으로 곤경에 처했을 가능성이 높다.
 
 
  셋째, 1947년 대둔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그는 ‘천수송(天水訟)’괘를 떠올렸다. 이는 64개 가운데 여섯 번째 괘로 위에는 건괘와 아래에는 감괘로 구성된다. 이 괘는 ‘항해 중에 큰바람을 만난 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송’이란 논쟁을 뜻한다. 이는 충돌, 갈등, 소송 등으로 인하여 시끄러운 상황을 말한다. 야산은 이 괘를 보고 전쟁이 곧 날것을 예측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서해안의 안면도로 이주하려고 하였다. 제자들은 모든 재산과 전답을 다 팔고 배를 타고 안면도로 들어갔다.
  야산의 제자들은 1947년부터 시작해서 6.25 전쟁 직전까지 안면도로 이주하였다. 배는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당시 야산을 따라 안면도에 이주했던 제자들은 대략 300호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가족까지 치면 천 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안면도에 들어간 제자들은 끊어진 실을 이어 시장에 내다 팔거나, 태극표 성냥을 만들어 팔았다.
 
  이때 안면도로 야산을 따라 들어간 제자들과 가족들은 육이오 전쟁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야산 선생님이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자신의 도력을 자기나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초들을 위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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